요즘처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게 느껴질 때,
문득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
조용하고, 잔잔하고, 그래서 더 진하게 마음에 남았던 작품.
바로 김향기 주연의 영화 《아이》(2021)다.
이 영화는 거창한 사건도, 빠른 전개도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난다.
다 보고 나면 가슴 한 켠이 뻐근해지고,
그 자리에 따뜻한 무언가가 자리 잡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진 힘이다.
보호종료아동, 미혼모, 그리고 갓난아이
영화는 어느 날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세 사람이 만나
서로의 삶에 조금씩 스며들며 변화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주인공 아영(김향기)은 보호종료아동이다.
어릴 때부터 아동복지시설에서 자랐고,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나이가 끝나자마자
그냥 ‘혼자’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낯설고 서툰 인물이다.
아영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살고 있지만,
현실은 공부보다 생존이 더 급하다.
그래서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우연히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다.
그 일이 바로 미혼모 영채의 아기 ‘현우’를 돌보는 것이다.
영채(류현경)는 말 그대로 ‘버티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젊은 나이에 임신했고, 아이 아빠는 곁에 없다.
세상의 시선은 차갑고,
가족도, 친구도 멀어진 상태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외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있는 아기, 현우.
말은 할 수 없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현우는 보호받아야 할 약자이지만,
동시에 아영과 영채에게 변화의 계기가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돌봄의 관계는 누구를 위한 걸까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고 깊은 부분은
‘돌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처음엔 단순한 아르바이트였던 일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영의 삶을 바꾸고,
영채에게도 새로운 감정을 열어준다.
아영은 처음엔 기저귀 가는 일도 서툴고,
울음을 멈추는 것도 버겁다.
하지만 매일매일 그 작은 생명을 마주하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현우가 웃는 모습을 보며 웃고,
배고파 울 때 본능처럼 반응하게 된다.
그건 책임감이라기보다, 사람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이었다.
놀라운 건,
그 돌봄이 아영의 내면을 다듬고 회복시킨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했던 아영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이건 단순한 성장 드라마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영채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엔 아영을 단지 돈을 주고 고용한 ‘도우미’로 대하지만,
서로의 사정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거리를 좁혀간다.
아영이 자신보다 더 아이를 신경 써주는 모습에
어쩌면 처음으로 ‘내 아이가 안전하다’는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김향기의 연기, 그 조용한 힘
사실 이 영화가 이토록 깊게 다가오는 이유는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히 섬세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김향기가 있었다.
김향기는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말없이,
표정 하나, 눈빛 하나로 아영의 감정을 전달한다.
특히 아영이 울음을 참으며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장면은
정말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눈물보다 더 짠한 순간이었다.
사실 보호종료아동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삶의 단단함을 요구하는데,
김향기는 그 단단함 속에 있는 부드러운 틈을
정말 잘 표현해냈다.
류현경 역시 현실적인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치고 예민하고, 쉽게 짜증내지만
그 안에 있는 무너진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김향기와의 감정선이 부딪힐 때
둘의 대비가 주는 에너지가 컸다.
소리 없이 스며드는 영화,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아이》는 음악도 크지 않고,
카메라도 인물에게 가까이 붙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관객이 스스로 인물들을 관찰하게 만든다.
이러한 연출은
감정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몰입하게 만든다.
관객은 아영이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도
그 속마음을 읽게 된다.
영채가 화를 내는 장면에서도,
그 이면의 외로움이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잘 살아야 한다”는 말 대신
“잘 살아내고 있구나”라고 말해주는 영화다.
당신도 누군가의 '아이'였고, 누군가의 '보호자'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했던 ‘아이’였고,
누군가에게 조용히 기대주는 ‘어른’이기도 하다.
그 둘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번갈아 등장하며
우리의 삶을 이어간다.
《아이》는 바로 그 순간을 조용히 포착해준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감정,
큰 사건 없이도 변해가는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들.
이 조용한 영화가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
《아이》는
지금 당장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큰 소리로 위로하지 않는다.
그 대신,
마치 어깨를 토닥이듯
“잘하고 있어요”라고 속삭여준다.
그 조용한 말 한마디에,
우리는 눈물이 날 것 같고
또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는다.
지금, 조금 지쳐 있다면.
사람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면.
혹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면—
《아이》는
당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작지만 깊은 영화가 되어줄 것이다.